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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운해는 등로주의로 본다
설악산 운해는 등로주의로 본다
  • 강우영 기자
  • 승인 2019.02.21 16: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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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떼기청봉의 웅장한 모습에 압도된다. 그 뒤로 주먹봉과
귀떼기청봉의 웅장한 모습에 압도된다. 그 뒤로 운무에 휩싸인 가리봉과 주걱봉이 보인다. 강우영 기자 

“주걱을 거꾸로 해놓은 것처럼 보이는 게 주걱봉이고 옆에 있는 게 가리봉이에요.”

“어디... 저기?”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식스헌드레드(이하 SH)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봤다. 안경잡이는 겨울 산행이 힘들다. 입과 코를 가리면 뜨거운 입김에 안경을 가린다. 마스크를 벗으면 코가 시렵다.

설악산 한계령에서 서북능선을 타고 한 시간가량 올라 선 1400여m 고지에서 SH가 숨을 고르며 휴대폰으로 지도를 살펴본다.

먼저 출발한 동료들은 끝청을 향해 이동중이다. SH와 나는 아직 미완등의 설악 중턱에서 먼 산과 산등성이의 광경에 취한 채로 숨을 골랐다.

“사람들이 말이야 등정주의인가봐!?”

나는 큼지막한 돌덩이처럼 무거워진 카메라를 내려놓고 어깨를 주무르며 투덜거렸다. 이 멋진 광경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야 하는데 앞선 동료들은 뒤꽁무니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럼 우리는 등로주의인거죠.”

SH가 맞장구를 친다. 오늘따라 나와 죽이 좀 맞는다.

“그렇지. 우리는 산을 알아가며 오르는 등로주의. 앞에 가신 분들은 오로지 정상을 향해 돌진하는 등정주의. 산은 우리처럼 산세를 봐가면서 음미하며 타야 하는 거 아냐?”

주걱봉을 보며 ‘저 봉우리를 암벽 등반으로 오를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끝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한참을 뒤처져 있자. 체력으로 똘똘 뭉친 등정주의 동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기 좋게 등로주의라고 했지만, 실상은 SH와 나는 허벅지가 뭉쳐오고 있었다.

“형... 우리가 체력이...”

“야! 우리는 등로주의야. 등로주의! 등정주의인가?”

힘이 드니 등로인지, 등정인지도 헷갈린다. 일단 쉬자. 체력도 체력이지만 끝청을 오르는 내내 계속 쉴 수밖에 없었다. 좌측으로 펼쳐지는 공룡능선이 허리를 펴고 일어날 듯 웅장하다. 귀떼기청봉은 천하를 호령하듯 웅장하게 서 있는데 그 모습에 압도된다.

SH는 아는 형에게 받았다는 모 제약회사에서 나온 에너지필을 물에 타서 연거푸 마시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앞장서 출발했다. 뭉친 근육이 풀어지고 힘이 솟아난다고 했다. 너는 약발이 잘 받는구나. 나는 그다지 느낌이 없는데. 도움이 된다니 일단 나도 받아마시고 다시 끝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끝청에 오르니 미확인비행물체처럼 보이는 원반 모양의 구름이 파란 하늘과 대비돼 더욱 선명해 손에 잡힐 듯했다. 영하의 바람이 산등성이를 넘어가며 옷 속으로 파고든다.

끝청을 넘어 삼각형으로 보이는 대청봉은 하늘의 끝에 도달한 듯 외롭지만, 홀도 우뚝하게 서있다. 대청봉이다.

우리는 잠시 쉬기로 했다. 등정주의로 똘똘 뭉친 체력짱들과 등로주의를 표방한 저질체력팀 두 팀은 중청대피소에 도착해 대청과 동해바다를 한참이나 바라보며 감상에 빠졌다.

6시간이 넘는 산행 끝에 중청대피소에 도착했다. 저녁을 푸짐하게 먹고 내일 일출을 볼 것이다.

다음날 새벽 4시 반쯤 일어나 누릉지를 끓여 먹은 두 팀은 대청으로 올랐다. 대청에 오를 때는 한 팀으로 올랐다. 일출은 끝내 보지 못했지만, 역시 설악의 운무는 환상적이고 몽환적이고... 아무튼 끝내줬다.

등로주의든 등정주의든 대청에 오르니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저 운무에 취해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떠오르는 태양을 기다렸다. 바람은 매서웠지만, 그 감동은 진했다. 우리는 고대하던 일출을 보지 못했지만, 일출을 본 듯 희망에 부풀어 하산을 시작했다.